说曹操曹操到 잘못 번역한 부분.

[養閒/其二]

说曹操曹操到의 유래에 대해 를 번역해 놓은 블로그를 봤는데, 글쓰신 분이 여자 분이시라 그런지 삼국지에 대한 이해가 많이 부족하신것 같았다. 삼국지의 전반적인 스토리도 그렇고 人名/地名/官職에 대한 이해도 많이 부족한것 같았다.원문소스의 오타 李崔나 董單을 그대로 이최,동단이라 하시다늬. 흐흑

비밀댓글로 살짝쿵 알려 드릴랫는데 오류가 나고 이메일 주소도 알수가 없어서.

◎李催이최=李傕이각님은 주로 郭汜곽사님과 세트로 등장하십니다.

◎然而信使未出时联军以杀到,眼看走投无路之际 ‘夏侯敦’ 奉曹操之命率军“保驾”成功

그러나 사자가 아직 채 나오지 않았을 때 연합군에 의해 이미 살해되었다. 순식

간에 갈 곳이 없어진 복성뚜이펑에서 조조의 명을 받드는 군사는 성공을 거두었다.

★然而信使未出时联军以杀到

이 부분은 삼국지 스토리를 잘 모르셔서 그러신것 같습니다.

‘사자가 미처 출발하기도 전에 연합군이 쳐들어 왔다(杀到)’는 뜻입니다.

★眼看走投无路之际 ‘夏侯敦’ 奉曹操之命率军

夏侯惇하후돈님은 조조의 부하장수입니다.

도니형은《三国演义》에서 전투중에 눈에 화살을 맞자 부모님이 주신것을 어찌 버리겟냐며 눈알을 꿀꺽하신 바로 그 몬도가네의 원조이시며, ‘快速傳說 夏侯淵하후연’님의 형님이기도 하십니다.

‘갈 곳을 찾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사이 조조의 명을 받은 하후돈이 군대를 이끌고 나타나 황제를 무사히 지켰다.’ 쯤 되겠습니다.

◎董单동단=네로董卓동탁님 이십니다.

◎第十四回“曹孟德移驾 幸许部: “조맹덕은 호위하러 행허부에 왔다"

★삼국연의 14회 제목은 ‘曹孟德 移驾 幸 许都’ 입니다.

http://www.guoxue.com/minqingstory/sgyy/sgyy.htm

‘조맹덕은 어가(御駕)를 허도(许都=許昌)로 행차(幸)케 하다’. 쯤 되겠습니다.

◎曹操被加封官爵 :조조는 관작이라는 벼슬에 봉해졌다.

★벼슬(官)과 작위(爵)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천자를 허도를 모시고 나서 조조는 대장군大將軍(官)에 임명되고, 무평후武平侯(爵)에 봉해집니다.《三國志·魏书一·武帝纪》「洛阳残破,董昭等劝太祖都许。九月,车驾出轘辕而东,以太祖为大将军,封武平侯。낙양이 폐허가 되었으므로 동소를 비롯한 여러사람이 태조(조조)에게 허창許昌으로 도읍을 옮길것을 권했다. 9월,어가는 동쪽(허창은 낙양의 동쪽에 있습니다.)으로 험난한 길을 떠났다. 태조(조조)를 대장군에 임명하고 무평후에 봉했다.」

◎被朝廷加封为镇东将军: 조연가에 의해 진동지역의 장군으로 봉해졌다

★被朝廷 加封 为镇东将军 朝廷 조정에서 진동장군에 봉했다.

廷(tíng))을 延(yán)으로 잘못 읽으셨습니다.

镇东将军은 四镇(镇东、镇南、镇西、镇北)장군중 하나입니다.

각 방면을 수비하는 장군직이라 보시면됩니다.

◎故奏请献帝 :故奏고진이 헌제에게 청하여

★(仍担心李催、郭汜来犯 이각과 곽사가 와서 일을 저지를 까 두려운)

故(까닭에) 奏请(上奏请求:표를 올려 청하다) 献帝 헌제에게 表표를 올려~

◎刚到洛阳城外,适逢李催、‘都记’领兵来攻洛阳。:막 도착한 낙양 성 밖에서 마침 이최를 맞딱들었는데 군사를 데리고 낙양을 공격하러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바이두 백과(http://baike.baidu.com/view/50033.htm)를 보시면 都记=郭汜곽사의 오타입니다. 역시 세트로 등장하시져.

만약 都记가 맞다해도 해도 顿号(、)로 연결 되었기 때문에 이각과 도기로 하는것이 맞습니다.

2009/10/05 16:48 2009/10/05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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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MissMin [2010/01/26 23: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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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鑒 _三國志부분

[養閒/其二]
http://www.guoxue.com/shibu/zztj/zztjml.htm

●卷第五十六

孝桓皇帝 永康元年(丁未,公元167年)

孝桓皇帝 建寧元年(戊申,公元168年) 건녕

孝桓皇帝 建寧二年(己酉,公元169年)

孝桓皇帝 建寧三年(庚戌,公元170年)

孝桓皇帝 建寧四年(辛亥,公元171年)


●卷第五十七

孝靈皇帝 熹平元年(壬子,公元172年) 희평

孝靈皇帝 熹平二年(癸醜,公元173年)

孝靈皇帝 熹平三年(甲寅,公元174年)

孝靈皇帝 熹平四年(乙卯,公元175年)

孝靈皇帝 熹平五年(丙辰,公元176年)

孝靈皇帝 熹平六年(丁巳,公元177年)

孝靈皇帝 光和元年(戊午,公元178年) 광화

孝靈皇帝 光和二年(己未,公元179年)

孝靈皇帝 光和三年(庚申,公元180年)


●卷第五十八

孝靈皇帝 光和四年(辛酉,公元181年)

孝靈皇帝 光和五年(壬戌,公元182年)

孝靈皇帝 光和六年(癸亥,公元183年)

孝靈皇帝 中平元年(甲子,公元184年) 중평

孝靈皇帝 中平二年(乙醜,公元185년年)

孝靈皇帝 中平三年(丙寅,公元186年)

孝靈皇帝 中平四年(丁卯,公元187年)


●卷第五十九

孝靈皇帝 中平五年(戊辰,公元188年)

孝靈皇帝 中平六年(己巳,公元189年)

孝靈皇帝 初平元年(庚午,公元190年) 초평


●卷第六十

孝獻皇帝 初平二年(辛未,公元191年)

孝獻皇帝 初平三年(壬申,公元192年)

孝獻皇帝 初平四年(癸酉,公元193年)


●卷第六十一

孝獻皇帝 興平元年(甲戌,公元194年) 흥평

孝獻皇帝 興平二年(乙亥,公元195年)


●卷第六十二

孝獻皇帝 建安元年(丙子,公元196年) 건안

孝獻皇帝 建安二年(丁醜,公元197年)

孝獻皇帝 建安三年(戊寅,公元198年)


●卷第六十三

孝獻皇帝 建安四年(己卯,公元199年)

孝獻皇帝 建安五年(庚辰,公元200年)


●卷第六十四

孝獻皇帝 建安六年(辛巳,公元201年)

孝獻皇帝 建安七年(壬午,公元202年)

孝獻皇帝 建安八年(癸未,公元203年)

孝獻皇帝 建安九年(甲申,公元204年)

孝獻皇帝 建安十年(乙酉,公元205年)


●卷第六十五

孝獻皇帝庚建安十一年(丙戌,公元206年)

孝獻皇帝庚建安十二年(丁亥,公元207年)

孝獻皇帝庚建安十三年(戊子,公元208年)


●卷第六十六

孝獻皇帝 建安十四年(己醜,公元209年)

孝獻皇帝 建安十五年(庚寅,公元210年)

孝獻皇帝 建安十六年(辛卯,公元211年)

孝獻皇帝 建安十七年(壬辰,公元212年)

孝獻皇帝 建安十八年(癸巳,公元213年)


●卷第六十七

孝獻皇帝 建安十九年(甲午,公元214年)

孝獻皇帝 建安二十年(乙未,公元215年)

孝獻皇帝 建安二十一年(丙申,公元216年)


●卷第六十八

孝獻皇帝 建安二十二年(丁酉,公元217年)

孝獻皇帝 建安二十三年(戊戌,公元218年)

孝獻皇帝 建安二十四年(己亥,公元219年)


●卷第六十九

世祖文皇帝 黃初元年(庚子,公元220年) 황초

世祖文皇帝 黃初二年(辛醜,公元221年)

世祖文皇帝 黃初三年(壬寅,公元222年)


●卷第七十

世祖文皇帝 黃初四年(癸卯,公元223年)

世祖文皇帝 黃初五年(甲辰,公元224年)

世祖文皇帝 黃初六年(乙巳,公元225年)

世祖文皇帝 黃初七年(丙午,公元226年)

世祖文皇帝 太和元年(丁未,公元227年) 태화


●卷第七十一

烈祖明皇帝 太和二年(戊申,公元228年)

烈祖明皇帝 太和三年(己酉,公元229年)

烈祖明皇帝 太和四年(庚戌,公元230年)


●卷第七十二

烈祖明皇帝 太和五年(辛亥,公元231年)

烈祖明皇帝 太和六年(壬子,公元232年)

烈祖明皇帝 青龍元年(癸醜,公元233年) 청룡

烈祖明皇帝 青龍二年(甲寅,公元234年)


●卷第七十三

烈祖明皇帝 青龍三年(乙卯,公元235年)

烈祖明皇帝 青龍四年(丙辰,公元236年)

烈祖明皇帝 景初元年(丁巳,公元237年) 경초


●卷第七十四

烈祖明皇帝 景初二年(戊午,公元238年)

烈祖明皇帝 景初三年(己未,公元239年)  明帝가 죽고 조방曹芳 즉위

烈祖明皇帝 正始元年(庚申,公元240年) 정시

烈祖明皇帝 正始二年(辛酉,公元241年)

烈祖明皇帝 正始三年(壬戌,公元242年)

烈祖明皇帝 正始四年(癸亥,公元243年)

烈祖明皇帝 正始五年(甲子,公元244年)

烈祖明皇帝 正始六年(乙醜,公元245年)


●卷第七十五

邵陵厲公 正始七年(丙寅,公元246年)

邵陵厲公 正始八年(丁卯,公元247年)

邵陵厲公 正始九年(戊辰,公元248年)

邵陵厲公 嘉平元年(己巳,公元249年) 가평

邵陵厲公 嘉平二年(庚午,公元250年)

邵陵厲公 嘉平三年(辛未,公元251年)

邵陵厲公 嘉平四年(壬申,公元252年)


●卷第七十六

邵陵厲公 嘉平五年(癸酉,公元253年)

邵陵厲公 正元元年(甲戌,公元254年) 정원  사마사司馬師가 조방을 폐위하고 조모曹髦를 즉위시킴.

邵陵厲公 正元二年(乙亥,公元255年)


●卷第七十七

高貴鄉公 甘露元年(丙子,公元256年) 감로

高貴鄉公 甘露二年(丁醜,公元257年)

高貴鄉公 甘露三年(戊寅,公元258年)

高貴鄉公 甘露四年(己卯,公元259年)

高貴鄉公 景元元年(庚辰,公元260年) 경원 사마소司馬昭가 조모를 죽이고 조환曹奐을 즉위시킴

高貴鄉公 景元二年(辛巳,公元261年)


●卷第七十八

元皇帝 景元三年(壬午,公元262年)

元皇帝 景元四年(癸未,公元263年)

元皇帝 咸熙元年(甲申,公元264年) 함희


●卷第七十九

世祖武皇帝 泰始元年(乙酉,公元265年) 태시

世祖武皇帝 泰始二年(丙戌,公元266年)

世祖武皇帝 泰始三年(丁亥,公元267年)

世祖武皇帝 泰始四年(戊子,公元268年)

世祖武皇帝 泰始五年(己醜,公元269年)

世祖武皇帝 泰始六年(庚寅,公元270年)

世祖武皇帝 泰始七年(辛卯,公元271年)

世祖武皇帝 泰始八年(壬辰,公元272年)


●卷第八十

世祖武皇帝 泰始九年(癸巳,公元273年)

世祖武皇帝 泰始十年(甲午,公元274年)

世祖武皇帝 咸宁元年(乙未,公元275年) 함녕

世祖武皇帝 咸宁二年(丙申,公元276年)

世祖武皇帝 咸宁三年(丁酉,公元277年)

世祖武皇帝 咸宁四年(戊戌,公元278年)

世祖武皇帝 咸宁五年(己亥,公元279年)


●卷第八十一

世祖武皇帝 太康元年(庚子,公元280年) 태강

世祖武皇帝 太康二年(辛丑,公元281年)

世祖武皇帝 太康三年(壬寅,公元282年)

世祖武皇帝 太康四年(癸卯,公元283年)

世祖武皇帝 太康五年(甲辰,公元284年)

世祖武皇帝 太康六年(乙巳,公元285年)

世祖武皇帝 太康七年(丙午,公元286年)

世祖武皇帝 太康八年(丁未,公元287年)

世祖武皇帝 太康九年(戊申,公元288年)


2009/09/22 10:01 2009/09/22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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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중 삼국지 관우전 중 이상한 부분.

[養閒/其二]

김원중 삼국지 관우전을 옮겨 적은 것인데 좀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

【건안5년 (200년) 조조가 동쪽 지역 정벌(서주)에 나서자 .유비는 원소에게 원군을 청하였지만 아들의 핑계를 대며 오지 않았다.그리고 원소에게 달려갔다.】

http://cafe.naver.com/ygsm7.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18363

관우전의 원문을 보면建安五年,曹公东征,先主奔袁绍。건안5년 조공이 동정을 하자 선주(유비)는 달아나 원소에게 갔다.유비가 원소에게 원군을 청하거나 원소가 아들 핑계를 대고 원군을보내지 않았다는 부분은 나오지 않는다.

기전의 특성상 한 인물의 기전만으로 사건을 파악하기 어려울때는 다른기전을 통해서 사건에 접근해야하는데 혹시 번역자 께서도 그런 작업을 통해 사건관련 인물의 기전에서 ‘유비가 원소에게 원군을 청하고 원소가 그것을 거절한’ 사실을 발견하고 번역할 때  넣으신건가. 관우전에 나오는 내용대로 조조,유비,원소의 기전을 살펴보자.

《三國志·魏書一·武帝紀》五年春正月,公將自東征備,諸將皆曰:“與公爭天下者,袁紹也。今紹方來而棄之東,紹乘人後,若何?”公曰:“夫劉備,人傑也,今不擊,必爲後患。袁紹雖有大志,而見事遲,必不動也。”郭嘉亦勸公,遂東擊備,破之,生禽其將夏侯博。備走奔紹,獲其妻子。備將關羽屯下邳,複進攻之,羽降。昌豨叛爲備,又攻破之。公還官渡,紹卒不出。공이 동정하여(서주의)유비를 치려하자 제장들이 모두 반대 하였다.「공과 천하를 다툴자는 원소입니다. 지금 원소와 대치중인 상황에 그것을 버려두고 동쪽을 치신다면 원소가 우리의 뒤를 노릴것입니다. 」조공이 말했다.「유비는 인걸이네. 지금 싹을 잘라버리지 않으면 나중에 더 큰 화가 될것이네. 그리고 원소는 야망은 크나 우유부단한자라 이것저것 재느라 제때에 움직이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네. 」곽가 역시 동정 할것을 권하였다.마침내 동정을 개시해 유비의 처자와 유비의 부하장수 하후박을 사로잡았고 유비는 원소에게 달아났다. 하비에 주둔중이던 관우는 투항했고,유비 편에붙어 반란을 일으킨 창희도 진압했다 . 공이 다시 관도로 돌아올때까지 원소군에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당시 조조는 관도에서 원소군과 대치중인 상황이 었다.

그래서 조조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서주의 유비를 치려하자 원소가 뒷치기 들어올것을 염려해 여러장수들이 반대에 나선것이다.

《三國志·魏書六·董二袁劉傳》建安五年,太祖自東征備。田豐說紹襲太祖後,紹辭以子疾,不許,豐舉杖擊地曰:“夫遭難遇之機,而以嬰兒之病失其會,惜哉!”太祖至,擊破備;備奔紹。건안5년,태조가 친히 군사를 이끌고 동쪽에 있는 유비를 정벌했다. 전풍이 태조의 뒤를 칠것을 권했지만 원소는 아들이 아프다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전풍은 지팡이를 들어 땅을 치며 탄식했다. 「다시 오기 어려운 기회를 아이 병 때문에 놓치다니 애석하도다」태조가 (서주에)이르러 유비를 격파하고 유비는 원소에게 달아났다.】

원소가 아들 병을 이유로 군사를 움직이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전풍이 군사를 움직이자고 한것은 (결과적으로 유비에게 원군이 될수도 있겠지만,) 적의 빈틈을 노리자는 것이 었지 유비를 돕자는 원군援軍의 성격은 아니었다. 그리고 유비가 원군을 청했다는 기록은 찾을수 없었다.

《三國志·蜀書二·先主傳》五年,曹公東征先主,先主敗績。조공이 동쪽으로 쳐들어 왔다. 선주가 패했다.】

조조가 쳐들어 오고, 유비는 패했다는 짤막한 기사만 있다.

그러나 위 기사(五年,曹公東征先主,先主敗績) 배송지 주《三國志·蜀書二·先主傳》魏書曰:是時,公方有急於官渡,乃分留諸將屯官渡,自勒精兵征備。備初謂公與大敵連,不得東,而候騎卒至,言曹公自來。備大驚,然猶未信。自將數十騎出望公軍,見麾旌,便棄眾而走。당시 관도의 사정이 급박하게 돌아가던 터라 여러 장수를 관도에 남겨두고, 공(조조)이 친히 소수의 정예병을 이끌고 유비를 쳤다. 유비는 공(조조)이 큰적(원소가)과 맞서고 있는 상황이라 동쪽으로 쳐들어 올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척후병이 조공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왔다고 보고하자 유비는 깜짝 놀라 믿으려 하지 않았다. 친히 수십기를 이끌고 나가 멀리서 공(조조)의 군대가 이른것을 보고는 부하들을 버리고 달아 났다.】를 살펴보면 당시 유비는 조조가 쳐들어 올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고, 조조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왔다는 첩보를 받고는 그냥 도망가 버렸다. 원군을 청하고 자시고 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다.

  유비가 원소에게 사신을 보낸적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원군을 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조조에 대항해 연합하자는 것이었으며 조조 동정 이전의 일이다. 유비가 서주자사 차주를 죽이고 조조에게 반기를 들자 여러 군현에서 유비에 호응해서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다. 이때 조조와 대치중이던 원소와 손잡기 위해 사신으로 손건을 보낸것이다. 【《三國志·蜀書二·先主傳》靈等還,先主乃殺徐州刺史車胄,留關羽守下邳,而身還小沛。東海昌霸反,郡縣多叛曹公爲先主,眾數萬人,遣孫乾與袁紹連和,曹公遣劉岱、王忠擊之,不克。五年,曹公東征先主,先主敗績。 】시간과 사신의 임무가 맞지 않는것이다.

그럼 도대체 ‘조조가 쳐들어 오자 유비가 원소에게 원군을 청했다’는 말은 어디에서 온것일까.설마 설마 하는 심정으로 찾아 봤는데 이럴수가 진짜 조조가 서주로 쳐들어오자 원소에게 원군을 청했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遂起二十萬大軍,分兵五路下徐州。細作探知,報入徐州。孫乾先往下邳報知關公,隨至小沛報知玄德,玄德與孫乾計議曰:“此必求救於袁紹,方可解危。”於是玄德修書一封,遣孫乾至河北。乾乃先見田豐,具言其事,求其引進。드디어 20만 대군이 다섯갈래로 서주를 향했다. 세작이 그것을 탐지 하여 서주에 보고했다. 손건은 우선 하비의 관우에게 사실을 알리고, 다시 소패로가 유비에게 상황을 알리고 대책을 논의 했다. 원소에게 원군을 청하는 것 말고는 달리 방도가 없을것이라 여겨 손건을 사신으로 보냈다. 손건은 하북에 이르자 먼저 전풍을 찾아가 자세한 상황을 전했다.】

《三國演義· 第二十四回》그러니까 소설에 나오는 내용이다(http://www.guoxue.com/minqingstory/sgyy/SGYY_024.htm 세째단락). 이문열 삼국지4권 35~36페이지를 보면 확인 가능하다.

사실 김원중 삼국지가 삼국지 좋아 하는 분들 사이에서는 계륵鷄肋취급을 당하고 있다. 유일무이한 번역본이라 개무시 할 수는 없지만 여러곳에서 발견되는 오류들로 인해서 학생들이나 조교들에게 째기 번역을 시킨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사기도 한다.

그러나 책을 직접 읽지않고 ‘이상한 부분에 대해’ 뭐라 말할지 못하겠고, 또 소설 내용을 슬쩍 집어 넣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아마 인터넷에 글을 옮기는 과정에 옮긴이 께서 본인이 알고 있던 것과 혼동하여 첨가 된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2009/09/04 18:42 2009/09/04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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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신문

[養閒/其二]

http://www.chinareviewagency.com/doc/1007/6/8/0/100768025_2.html?coluid=6&kindid=29&docid=100768025&mdate=1011173939    이 사이트 내용을 재편집 한것임.


신문형식으로 100회이상 발행됐고 나중에 책으로 엮어서 출판했는데 판매도 꽤 됐다.
사건현장에 실제 기자를 파견해 취재하는 형식을 취했고 기사내용은 정사를 근거로 했다.

황개의 고육계나 제갈량의 동풍을 빌리는 고사같은 ‘검증 안된’ 소문도 기사에 실었다.그리고 '《長鏡頭——東吳老將黃蓋意欲降曹?》-동오의 노장황개 조조군에 투항하려는것인가?'와 같은 기사는 나중에 사실확인을 통해 루머로 밝혀졌다면서 기사로 인해 조조군에 악영향을 끼쳐 죄송하다는 사과문도 실려있다.

이 뿐 아니라 '《才女蔡文姬 十二年之後從匈奴歸來故鄉》-흉노에 끌려갔던 채문희, 12년만에 귀향 (본보 왼쪽페이지 상단왼쪽)'같은 가십성 기사도 실려있으며, 호외號外도 발행하는등 신문형식을 제대로 취하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본보내용

《三國志新聞》第47期의 주요 내용은 적벽대전에 관한것이다.

헤드라인 《曹軍20萬人 孫劉聯軍5萬人挾江布陣——序戰聯軍取勝》

緖戰에서 연합군이 승리하고 조조군은 오림으로 퇴각해서 장기전에 돌입했다는 내용.

그 아래의 지도는 양군의 布陣상태.

왼쪽 페이지《江東決戰,本報的深度預測 강동결전, 본보심층분석》

두 사람의 전문가가 나와 양측의 우세를 점치고 있다.

조조군승리예측 : 군사평론가 마수馬修장군(오른쪽투구쓰신분)

『曹軍大勝是板上釘釘』-조조군의 승리는 따놓은 당상이다.

이제까지의 군사데이터를 분석해본 결과 漢나라 건국이래 1대4의 병력 열세를 극복한 예가 없었다. 조조군이 서전에서 비록 패하긴 했지만 힘을다해 수군을 훈련시키고 있으니 본격적인 전투에 들어가면 조조군이 필승 할것이다. 또한 지금은 비록 손권과 유비가 손을 잡고 있지만 서로다른 꿍꿍이를 가지고 있어서 전세가 불리해지면 서로 목숨부지하기에 바빠 앞다투어 항복을 청할 것이다.

연합군승리예측 : 평론가 신시룡申示龍

『周瑜的智謀,未可小覷』- 주유의 지모를 과소평가 해선 안돼.

연합군은 확실히 병력면에서 열세에 놓여 있고, 적군의 도강지검을 선점하고 있다는 잇점외에는 겉으로 보기에는 그 어떤 잇점도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북방에서는 그다지 활약상이 없어 이름이 알려지지 않앗지만 연합군의 총사령관 주유는 출중한 인물이다. 손책을 도와 강동의 기반을 다진 상승무패의 명장이다. 그런 그가 강력히 主戰論를 편데에는 승산이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일것이다.

조조군은 수전 경험이 부족한데다 육전陸戰에 대비해 배에다 마필馬匹과 양초粮草를 가득 싣고 있어서 기동성이 떨어진다. 주유가 이런점을 간과 할 리가 없다. 승패는 반드시 물위에서 결정나게 될것이다. 江東의 안위安危가   젊은 천재지휘관 주유의 손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號外
《20萬曹軍在赤壁全軍覆沒》-조조측 20만 적벽에서 전멸

『聯軍火攻計成功,曹操平定江南計劃中止』-연합군 화공성공, 조조 강남평정계획중지

『丞相曹操九死一生脫出險地』-승상조조 구사일생으로 탈출

『反間黃蓋回歸本陣』- 황개 반간계를 성공시키고 귀대

2009/09/02 00:29 2009/09/02 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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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에티가 아닐까.

[養閒/其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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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전부터 계속된 광고((정확한 방영일은 알려주지 않은채))를 보고 이제나 저제나 기다렷는데
방심한 틈에 시작(8월1일부터) 놓쳐 버리고 8회부터 보게 됐다.

대략은 심배토산-유엽발석거-허유투항-오소불바다-장합,고람투항-원소발림

캡쳐한 부분은 심배가 토산을 높이 쌓아 화살공격을 퍼붓자는 계책을 내는 장면 인데,
계책대로 하면  서주를 얻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말하고 있다.
뜬금없이 왜 서주가 나왔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허창은 예주에 속하는데 어찌된 일인지.

연의(「第三十回」 战官渡本初败绩 劫乌巢孟德烧粮)를 보면
조조의 진채앞에 토산을 높이 쌓아 위에서 화살 공격을 퍼부으면 조조군이 관도를 버리고 물러날것이고  그곳을 차지하면 허창을 깨뜨릴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审配曰:“今可拨兵十万守官渡,就曹操寨前筑起土山,令军人下视寨中放箭。操若弃此而去,吾得此隘口,许昌可破矣。”)
http://www.guoxue.com/minqingstory/sgyy/SGYY_030.htm



 


2009/08/10 16:36 2009/08/10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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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애니(김청기감독)중에서

[養閒/其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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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閑山島夜吟 _李舜臣

     水國秋光暮 驚寒雁陣高
     憂心轉輾夜 殘月照弓刀
2008/11/21 16:56 2008/11/21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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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중국수입 영화는 '삼국지'

[養閒/其二]
▼1929/06/01/중외일보▼


▼1929/06/01/동아일보▼


▼1929/10/13/동아일보 - 영화감상평▼



신문이미지
http://kh2.koreanhistory.or.kr - 연속간행물/신문



2005/10/31 01:24 2005/10/31 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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